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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농구 특집] 그 때 우리는 뜨거웠다!

생활정보|2016. 12. 1. 00:24

아마추어 농구 특집 '42.0' 제 8화

그때 우린 뜨거웠다! 고교농구 라이벌 열전


지금의 프로농구와 국가대표가 있기에 앞서 농구스타를 꿈꾸며 땀과 눈물을 흘리던 중,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농구의 시작점이 되었던 무대, 바로 중, 고등학교 농구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프로출신 지도자부터, 전설적인 선수들의 훈련 일화, 그리고 ‘지금’을 이끌고 있는 우리 한국농구의 기대주를 소개하고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를 위해 바스켓코리아 김우석, 이재범 기자, 점프볼 손대범 기자 등 평균 나이 42.0세의 농구전문기자 셋이 모였습니다.


 [아마추어 농구 특집 '42.0' 컨텐츠 목차]

제 1화. '프로산' 코치들의 아마추어 현장 생존기

제 2화. 무엇이 송도고를 특별하게 만들었나

제 3화. '농구대통령' 허재는 타고난 천재였을까?

제 4화. 미국, 유럽농구? 엄청난 차이는 아니었어요

제 5화. '호흡기'가 필요한 아마농구, 처방전 없나요?

제 6화. 그들의 '영광의 시대'를 기억하시나요?

제 7화. 침체된 여자농구, 밝은 미래를 그려봅니다

제 8화. 그때 우리는 뜨거웠다! 고교 라이벌

제 9화. 세계농구 속 한국은 어땠나?

제 10화. 고교농구 한일전, '슬램덩크의 나라' 일본 인프라를 말하다 

이번 주제는 ‘라이벌’입니다. 고교 농구에는 서로의 역사를 빛낸, 그리고 지금도 그 역사를 만들고 있는 라이벌 학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무대가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만나든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던 그들. ‘42.0’의 8번째 이야기는 앞으로의 고교농구를 즐기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 만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정리_손대범(점프볼 편집장)


취재, 글_ 손대범, 김우석(바스켓코리아 편집장), 이재범(바스켓코리아 기자)



 

▲ 서울의 두 명문 

경복고 대 용산고


학생스포츠에서의 라이벌전은 성인농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준다. 전력만으로 승,패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라이벌전의 ‘변수’는 분위기다. “대학생이 되어 치르는 라이벌전과 고등학생이 치르는 라이벌전은 다른 점이 많다. 10대 선수들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경복고는 늘 멤버가 화려했지만 용산고를 상대로 시원한 승리를 챙긴 적은 많지 않다.” 양 팀 동문들에게 ‘경복-용산’을 묻자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이다.

 


두 팀이 처음부터 라이벌은 아니었다. 초창기 경복고를 이끈 농구인들은 “우리 라이벌은 휘문고였다”라 입을 모은다. 용산고가 저력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경복고와 휘문고가 전국체전 진출권을 놓고 다투는 등 경쟁 의식을 불태웠다. 신동파의 버저비터는 당시 양 교 라이벌전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경복고 출신 김인건 전 태릉선수촌장은 “체전 뿐 아니라 일본 원정을 가는 선발 경기도 비공개로 열리고 했다”라고 회고한다.


두 팀 역사는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경복고는 1921년 개교 이래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다. 농구부 역시 1928년 공식대회에 참가하는 등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김인건(전 태릉선수촌장), 방열(대한민국농구협회 회장), 유재학(모비스 감독), 전희철(SK 코치), 우지원(SBS 해설위원), 은희석(연세대 감독) 등 많은 농구인을 배출했다. 현역 중에도 함지훈과 전준범(모비스), 문성곤(KGC인삼공사), 이종현(모비스)과 최준용(SK) 등이 경복고 출신이다. 경복고 농구는 늘 화려했다. 라인업도 두꺼웠고, 개인기가 중심이 된 화려한 농구를 지향했다.



경복고 시절 덩크를 하는 전희철의 모습. 경복고는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잘하는 농구 명문고이다(사진제공=점프볼)

자주색 유니폼과 ‘까까머리’로 대변되는 용산고 농구부는 그보다 늦은 1949년에 창단했다. 창단 후 한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1969년 춘계연맹전을 시작으로 농구계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들의 등장은 ‘휘문 대 경복’으로 대변되던 고교농구 판도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허재, 이민형 등은 용산고를 전국에 알린다. 신선우(WKBL 총재), 전창진(전 농구감독), 유도훈(전자랜드 감독), 김승기(KGC 감독) 등을 배출해온 용산고 농구는 양문의 코치에 의해 완성됐다. 조직적인 수비와 근성을 앞세운 농구는 용산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허재 시대 이후 다시 용산고를 우승에 올려놓은 김병철(오리온 코치)은 “대단히 엄격하고 타이트했던 팀”이라며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이후 양동근(모비스), 김태홍(KCC), 이승현(오리온) 등 KBL 스타들도 많이 배출됐다.


두 팀이 본격적으로 ‘꼭 이겨야하는’ 맞수의 구도를 그리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용산고 전력이 강해진 배경에는 역대 최고의 고교생 중 한 명인 허재가 있었고, 파트너 이민형도 활약이 대단했다. 도저히 이기기 힘든 팀이 된 것이다. 허재 졸업 후 두 팀 전적은 다시 비슷한 수준을 이루었다. 용산고가 1~2번 더 이기는 정도였다. “김승기 감독, 김재훈 코치, 김재열 등 허재 이후 용산고도 상당히 좋았다. 농구가 대단히 터프했다. 5번 붙으면 2승 3패 정도 전적이었다.” 경복고 출신 정한신 해설위원(STN)의 회고다.



용산고 농구부를 떠올리면 절대 빠질 수 없는 허재. 그의 용산고 시절(오른쪽에서 4번째.사진제공=점프볼)

90년대에도 두 팀은 ‘쌍벽’을 이루었다. 경복고에 전희철, 우지원이 활약했다면 용산고에서는 김병철이 펄펄 날았다. 그 뒤로도 두 팀의 신경전은 팽팽했다. 은희석(경복고) 연세대 감독은 “쉽게 가는 경기가 없었다. 나가서 지기라도 한다면? 음….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학교에서도 관심이 많았다”라고 돌아봤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김일두(경복고)도 “우리의 유일한 적수는 용산고였다. 고대와 연대 관계와 비슷했다. 용산고에게 지면 치명적이었다. 부담이 컸다. 코치님들도 그랬을 것 같다”라고 기억했다.


용산고를 이끌었던 이효상 현 고려대 코치는 그 부담감을 몸소 느낀 인물이다. 그는 그 중압감을 이기고 분위기를 올리기 위해 몸소 삭발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승현이가 1학년 때(2008년)였을 것이다. 춘계대회 예선에서 경복고에 24점차로 졌다. 그날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다. 나부터 머리를 깎고 심기일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모두가 따라서 다 삭발을 하더라. 결승에서 기어이 승리(80-66)를 거두었다. 그때 경복고에 김민욱, 장재석, 전준범, 김기윤 등이 있었다. 우리보다 멤버가 좋았다.” 이승현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연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벌했다. 진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날 예선 경기를 져버렸다. 다음날 코치님이 삭발을 하고 오셨더라. 어쩌겠나. 나는 1학년이었는데….(웃음).”


서로 이를 악물고 보낸 3년, 그런데 운명이 가끔 장난을 부려 ‘적수’가 ‘동료’로 되는 때도 있다. 김병철과 전희철이 그랬다. 용산고 에이스 김병철은 전희철, 우지원이 버틴 경복고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다. “우리는 정신력으로 대변되던 팀이었다. 엄청난 훈련으로 부족한 부분을 극복해왔다. 경복고는 멤버가 화려했지만, 우리에게는 밀렸다. 우리는 정말 터프한 수비를 앞세웠으니까. 그래서인지 (전)희철이가 고려대에서 같이 뛰게 됐을 때 그 이야기만큼은 안 하고 싶어 했다(웃음). 맨날 우리에게 졌으니까.”



'두목' 호랑이와 '신흥' 호랑이의 대결은 용산-경복 시절부터 시작되었다(사진제공=점프볼)

이승현도 그랬다. 2년 아래 후배 이종현이 경복고에 막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그날 내가 종현이에게 5번인가 블록을 당했다. 막막하더라. 어찌나 팔이 길고, 키가 크던지, 고민을 정말 많이 하게 만든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나중에 고려대에서 내 파트너가 됐다. 나중에 ‘내가 너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라고 말하니까 종현이도 받아치더라. ‘형 힘 때문에 내가 더 힘들었다’고.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된 것 같다.”


흥미로운 건 두 팀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화려한 경복, 터프한 용산’이다. 하지만 용산고 출신들은 이 말을 꼭 붙인다. “그래도 우리가 늘 이겨왔다.”


최근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다. 2012년 쌍용기 대회 4강전이었다. 경복고에는 이종현과 최준용이 있었다. 반면 용산고는 허훈, 정희원, 김국찬 등이 있었지만 신장과 깊이에 있어 경복고에 밀린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허훈이 29득점을 기록하며 코트를 휘저었다. 용산고는 64-62로 경복고를 탈락시켰다. 그들은 결승전에 진출했다. (이 경기는 용산고에게 의미가 있었다. 경복고 센터 이종현은 중학교 졸업 당시 중등부 랭킹 1위였던 선수였다. 그런 이종현을 두고 용산고와 경복고가 펼친 스카우트전도 치열했다. 그러나 스카우트 전쟁의 승자는 경복고였다. 지금도 양 교는 유망주를 두고 눈치 싸움을 펼치고 있다.)



KBL에서 활약 중인, 혹은 활약이 예고되는 경복-용산 출신 선수들(사진제공=점프볼)

그런가 하면 프로무대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모비스 유재학 감독과 양동근은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다. 유재학 감독은 용산중에서 경복고로, 양동근은 삼선중에서 용산고로 진학했다. 일반적으로 용산중 선수들은 용산고로, 삼선중 선수들은 경복고 진학해왔지만, 둘은 엇갈린 행보를 걸은 것이다. 중학생 시절 용산중을 39연승으로 이끌었던 유재학은 “용산고에는 잘 하는 선배가 너무 많아서 내가 뛸 자리가 없었다”며 경복고를 택한 배경을 전했다. 이후 경복고에서 그는 5개 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경복고가 용산고에게 강세를 발휘했던 시절이었다.


양동근은 삼선중에서 용산고로 갔다. 용산고는 양동근의 키워드 중 하나인 ‘근성’을 이식한 곳이다. 그에게 경복고와의 대결은 늘 기다려지던 경기였다. “경복고 전력이 워낙 좋았다. 진다는 생각자체를 안 하고 임해야 했다. 사실 나는 1학년 때는 게임을 많이 못 뛰었다. 정선규 코치, 박성훈 코치 등 가드 포지션이 쟁쟁했다. 그런데 경복고 전만큼은 뛸 수가 있었다.” 양동근의 말이다. 당시 코치를 맡고 있던 양문의 선생은 1학년 양동근에게 경복고 전만큼은 휘젓고 다니게끔 권한을 주었다. “경복고 1학년에 옥범준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한번 붙어보라고 내게 기회를 주셨다. ‘너가 (중학생 때) 쟤 때문에 경기를 못 뛰었으니까 막아라. 오기라도 부려라’라고 지시하셨던 기억이 난다.”


치열한 승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경복고가 조금 앞서는 양상이다. 2014년 쌍용기 결승, 2015년 연맹회장기 결승에서는 경복고가 용산고를 꺾고 우승했다. 2016년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도 경복고가 서정현(201cm)을 앞세워 74-56으로 승리했다. 2017년에도 객관적인 전력은 용산고보다는 경복고가 앞선다. 양재민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되풀이 된 이들의 지긋지긋한(?) 인연과 역사가 말해주듯, 다시 만날 때도 이들의 라이벌전은 불꽃 튀는 접전이 될 것이다.



 

▲ 전라도 라이벌의 전쟁

전주고 대 군산고


전라도에도 라이벌이 존재한다. 60년 넘게 전라도에서 혈투를 펼치고 있다. 1925년 창단한 전주고와 1946년부터 역사를 시작한 군산고가 그 주인공. 그런데 두 학교가 본격적으로 ‘농구 라이벌’이 된 건 1960년대 이후다. 군산고 출신인 경희대 최부영 농구 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부터 선발전을 통해 체전에 나설 팀을 정했는데, 그러면서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다. 단판 승부였기에 더 치열했다. 1960년대 중, 후반에는 군산고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멤버였다. 판정을 제외하곤 말이다. 근데 편안하게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놔두지 않으니까”라고 회상했다. 군산고와 전주고 출신들은 당시 경기를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 혹은 ‘전쟁’이라 표현했다.


이후 20년 동안 두 팀은 팽팽한 대결을 펼쳤다. 1970년대 초반에는 전주고가 김만진(전 연세대 감독)을 앞세워 우위를 점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군산고가 오세일(군산고 감독), 최철권(숭의여고 감독)을 앞세워 웃었다. 오세일 군산고 감독은 “1970~80년대는 2~3년을 주기로 흐름이 나눠졌던 것 같다. 내가 학생이었던 1970년대 중, 후반에 군산고가 평가전에서 성적이 좋았다. 또, 이영주 코치가 존재했던 1980년대 중반에도 군산고가 좋았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숭의여고 최철권 감독 역시 같은 이야기를 내놓았다. 최 감독은 “1979년 대전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에서 군산고가 우승을 했다. 전북체고 농구부와 합병을 하면서 전력이 더 좋아졌다. 전주고와는 항상 치열하게 예선전을 치렀지만, 당시는 군산고가 앞섰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전주고 출신 김학섭과 군산고 출신 이창수, 지금은 나란히 지도자로 활동중이다(사진제공=점프볼)

밋밋(?)했던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는 전주고가 득세했다. 1990년대 초반 전주고는 손규완(KGC인사공사 코치)을 앞세워 군산고를 연이어 꺾었다. 그 뒤는 성준모(모비스 코치), 김종학(전 오리온 선수) 콤비가 전주고를 정상권에 올려놨다. 이 시기 전주고는 지역평가전은 물론이고 전국대회에서도 상위에 오를 정도로 강팀이었다. 그 뒤 한동안은 전주고가 두 팀 관계에서 우위를 지켜왔다. 1990년대 후반 전주고를 이끌었던 김학섭 전주남중 코치는 “내가 뛰는 동안에는 계속 전국체전에 나갔다. 우리 때는 전국체전 3연패를 달성했다.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라고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 흐름은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김현민(kt)과 김민섭(SK)이 주축이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군산고가 추월한 상태다. 한국농구의 미래로 불리는 이정현과 신민석이 좋은 활약을 보인 덕분이다.


두 팀은 응원 문화도 유별났다. 최부영 부장은 “1968년 중3때 일이다. 선발전을 보러 경기장에 갔는데 전쟁터였다. 게임이 세 시간 반 정도는 걸린 것 같다. 심판이 선수 항의에 질려서 도망갔을 정도다. 지금 그랬다면 영구제명을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다들 자존심이 걸리다보니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도시에서도 없었을 것”이라 기억했다. “한번은 전주고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군산고 선수들이 체육관 밖으로 못 나가게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전주 MBC로부터 탑차를 동원해서 간신히 도망 나온 적도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정도였다. 군산고에서 따로 응원오기도 힘들었다. 왔으면 패싸움이 났을 테니까.”



이제 라이벌 전의 승패는 이들에게 공이 넘어갔다(사진은 군산고의 신민석.사진제공=점프볼)

군산고 오세일 감독은 “정말 치열했던 시대였다. 라이벌 전에서 이기면 교장 선생님이 직접 선수단을 불러 모아 자장면을 사주셨다. 반대로 경기에서 지면 왜 졌는지 브리핑해야 했다”라고 덧붙였다. 당시를 경험한 전주고 출신의 강양택(LG 코치)은 “경기 후 집에 가기가 쉽지 않았다. 진 학교 학생들이 상대팀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풀이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김학섭 코치도 “평가전이 끝나면 한참을 락커룸에서 기다렸다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선수들이 바로 나가면 응원을 왔던 학생들끼리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 말했다.


한편 두 학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전주고는 김만진(전 연세대 감독), 박인규(KBL 감독관), 강양택(LG 코치), 성준모(모비스 코치), 김학섭(전주남중 코치), 조성민(kt 선수) 등이 대표적이다. 군산고는 오세일 감독과 ‘97점 전설’ 최철권 감독을 필두로 이창수(군산고 코치), 정재호(전 오리온), 이현민(KCC), 이호현(삼성), 김영훈(동부) 등이 있다.



 

▲부산 농구의 자존심

동아고 대 부산중앙고


동아고는 1958년 농구부를 창단했다. 부산 중앙고는 동아고보다 18년 늦은 1976년에 농구부를 만들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동아고는 부산 농구의 터줏대감이다. 후발주자인 중앙고는 동아고를 따라가는 입장이었다. 동국대 서대성 감독은 “내가 학교 다닐 때 중앙고와 경기가 안 될 정도로 우리가 강했다. (전국체육대회 출전이 걸린) 평가전을 하면 더블 스코어로 이길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며 “라이벌이라기보다 같은 지역에 있으니까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 출전을 위해서 예선전을 하는 팀”이라고 중앙고를 기억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역사의 깊이가 더해지며 양 교도 라이벌로서 자리 잡았다. 프로에서 뛰고 있는 양교 출신 선수들을 만나면 모두 ‘라이벌’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아고를 나온 최승욱(LG)은 “두 학교가 평가전을 해서 라이벌 의식이 많이 있다”며 “다른 팀이 중앙고와 연습경기를 하면 중앙고의 잘 했던 선수나 전력에 대해서 물어보고 파악을 했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중앙고 출신인 천기범(삼성)은 “라이벌전이기에 무조건 이기려고 경기에 임해 성장했던 거 같다. 주위에서 우리가 무조건 진다고 했는데 동아고와 재미있는 경기를 하면서 실력이 늘었다”며 “평가전을 준비하는 기간이나 규모가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과 다르지만, 마음가짐은 같았다”고 했다.



색깔이 상반된 두 팀 부산중앙고와 동아고(사진은 부산 중앙고. 사진제공=점프볼)

동아고와 중앙고가 라이벌의 구도를 이루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 오성식 코치가 중앙고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박도경 LG 코치는 전력이 향상된 시기를 오성식 입학 이후로 꼽았다. “오성식 선배부터 이홍수까지 6~7년 정도 중앙고의 선수들이 동아고보다 좋았다”며 말이다. 박훈근 코치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오)성식이 형을 따라서 중학교 때 잘 했던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중앙고로 진학했다. 그러면서 동아고와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그러다 주희정, 조우현, 구병두 등이 다시 동아고로 또 진학했다. 그 뒤 계속 좋은 선수들이 동아고로 갔다.”


오성식 전 코치는 동아고가 아닌 중앙고로 진학한 이유를 묻자 “중학교 때 소년체전에서 3년 연속 우승했다. 1,2학년 때 선배들이 다 좋아서 경기도 못 뛸 정도였다”며 “선배들이 동아고로 많이 가는 편이었는데, (중학교) 은사님이 중앙고로 가셔서 나도 중앙고에 자연스럽게 진학했다”고 기억했다. 중앙고의 터전을 마련한 은사는 강용길 코치다. 박도경 코치는 “강용길 코치님께서 스카우트를 잘 하시고, 기본기 강조를 많이 하셨다. 하루 종일 기본기만 했다. 추승균 감독, 박훈근 코치가 그래서 기본기가 좋은 거다”며 웃었다.


중앙고에서 다시 동아고 시대로 흐름을 바꿨던 주희정(삼성)은 “동아고가 중앙고보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그 때 선수들도 5~6명밖에 없어서 경기를 뛸 수 있었다. 중앙고는 꾸준하게 성적을 내는 반면 동아고는 성적이 안 나던 시기라서 우리가 가서 성적을 내보자며 동아고에 진학했다”고 전했다. 이어 “핸드볼부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운동 많이 해서 대회마다 우승을 했다. 농구부도 자연스럽게 운동량이 엄청 많았다”며 “그래도 고3 때 성적이 잘 나고 대학을 잘 가니까 농구부가 26명으로 늘었다”고 예전의 추억을 들려줬다.


한국중고농구연맹에서 발행한 2016년도 선수명단 책자에는 춘계연맹전, 연맹회장기, 협회장기, 대통령기, 쌍용기, 종별선수권, 추계연맹전 대회의 입상현황이 나와 있다. 이 책 자료에 따르면 부산 동아고는 연맹회장기 2회(1993년, 2006년), 협회장기 4회(1986년, 1988년, 1994년, 2005년), 종별선수권 1회(2011년), 추계연맹전 3회(1991년, 1992년, 2014년) 등 10회 고교 무대 정상에 섰다. 부산 중앙고는 협회장기 1회(1992년), 추계연맹전 2회(1977년, 2000년) 등 3회 우승했다. 여기에 올해 연맹회장기와 협회장기에서 우승기를 가져갔다. 또한 대한체육회 주관의 전국체전에서도 1992년과 올해 정상을 밟아 총 7회 우승했다. 동아고는 우승 횟수에서 앞서지만, 중앙고는 지방의 팀이 더 인정하는 전국체전 우승 트로피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엎치락뒤치락 흐름 속에 있던 두 팀.(사진은 동아고 2000년 우승 당시. 사진제공=점프볼)

1991년부터 동아고를 이끌고 있는 이상국 코치는 “(부임 이후) 세 번 정도 전성기가 있었던 거 같다. 김주성과 박지현이 있었을 때 전력이 좋았는데 우승을 하지 못했다. 허일영이 있던 3학년 때도 준우승만 했다. 정민수, 변기훈, 김동량, 최부경 등이 있을 때 우승을 좀 했었다. 조우현, 주희정, 구병두 재학 시절에도 전력이 좋았던 시기”라고 떠올렸다. 정민수(KCC)는 “2학년 때 3학년이 2명밖에 없었다. 동기는 변기훈과 김동량이고, 1학년에 최부경이 있었다. 우리보고 약체라며 예선 탈락할 거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진짜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는데, 협회장기에서 우승했다”고 자랑했다. 정민수와 그의 동기들은 3학년이었던 2006년 연맹회장기 우승까지 맛봤다.


중앙고는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1992년과 올해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추승균 KCC 감독은 “우리 고3 때 (서)장훈이, (현)주엽이가 있던 휘문고와 전국에서 2강이었다”며 “동계훈련 때 대학 팀과 연습경기에서도 다 이겨서 ‘너희가 우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고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해 중앙고 에이스였던 양홍석은 “3관왕으로 학교의 역사를 새로 쓰려고 한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는데, 1992년의 영광(2관왕)을 뛰어넘는 목표를 실제로 달성했다.


주희정이 잠깐 언급했지만, 동아고는 훈련량이 많다면 중앙고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강병현(KGC인삼공사)은 “중앙고가 운동을 안 하는 팀으로 유명했다. 추승균 감독님께 여쭤보니 그 때는 정말 열심히 했다고 들었다. 내 위 5~6년 선배부터 운동을 안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며 “1~2년 선배들은 열심히 하고, 우리도 대학 진학을 위해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 다른 팀 선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운동량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주희정의 말에 동의했다. 이처럼 양 팀의 상반된 분위기처럼 팀 역사와 색깔도 상반된다. 동아고는 꾸준한 반면, 중앙고는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면 동아고와 중앙고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전국체전 출전 횟수를 살펴보면 2001년부터 올해까지 16년 동안 동아고가 10번, 중앙고가 6번 나갔다. 이 사이 중앙고가 2년 연속 출전한 건 2015년과 2016년뿐이다. 3년 내내 전국체전 출전한 선수들이 동아고에는 있는 반면, 중앙고에는 없다. 물론 박훈근 코치와 박도경 코치의 말에 따르면 중앙고가 1990년대 초반 3년 연속 전국체전에 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근 동아고가 주춤할 뿐 전체적인 흐름에서 동아고의 꾸준함이 돋보인다. 박훈근 코치도 “동아고가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용산고나 경복고와 비교할 수 있는 지방의 고교는 동아고와 송도고 정도일 거다”며 동아고의 전통을 인정했다.



한국농구의 살아있는 전설 김주성, 그 역시 명문 동아고 출신이다(오른쪽 상단 청대시절 김주성. 사진제공=점프볼)

중앙고는 이에 반해 전국체전 우승처럼 강하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상국 동아고 코치는 “우리는 준우승을 몇 번 했는데, 서울 팀이 워낙 강해서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기 정말 힘들다. 중앙고의 이번 전국체전 우승은 대단한 거다”고 라이벌 팀의 전국체전 우승을 치켜세웠다. 또한 천기범이 5명의 선수로 협회장기에서 준우승하며 부산 중앙고라는 이름을 확실히 알린 적도 있다.  


한편 양 팀이 정기적으로 맞붙는 건 전국체전 평가전이 유일하다. 평가전이 혈전으로 펼쳐지는 건 당연하다. 박훈근 코치는 “육탄전이라서 한 경기 끝나고 나면 온 몸에 멍이 들곤 했다”고 돌아봤다. 응원 열기도 뜨거웠다. 박도경 코치는 “학생들을 불러서 응원도 했다. 구덕체육관에서 경기를 했는데, 학생들이 관중석 2/3정도를 채워서 파도타기 응원도 하고 그랬다”고 기억했다. 응원이 오히려 경기보다 더 치열했다. 허일영은 “우리보다 응원 온 학생들이 서로 시비가 붙어서 싸우기도 했다. 선수들이 오히려 덜 신경을 썼다”며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뜨거운 평가전에서 거둔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김창모(동부)는 “전국체전에 나가니까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좋은 용품 지원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명예다. 동문들끼리 ‘너희는 전국체전에 몇 번 나갔냐?’라고 물어본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전에서 몇 번 이겼냐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며 전국체전 출전을 우승과 맞먹는 훈장처럼 여겼다.  


현재 대학 지도자와 프로에서 활약 중인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살펴보면 동아고가 좀 더 많은 편이다. 주요 동아고 출신은 서대성(동국대 감독), 장봉군(단국대 체육부장)과 석승호 감독, 황준삼 감독, 허남영 코치, 김승환 코치, 주희정, 김주성, 박지현, 신동한, 김태술, 허일영, 김동량, 정민수, 변기훈, 최부경, 최승욱(LG), 장문호 등이 있다. 중앙고 출신은 위성우(우리은행 감독), 추승균(KCC 감독), 박훈근(삼성 코치), 박도경 코치, 강병현, 김우겸, 김창모, 천기범 등이다.


기사제공 바스켓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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